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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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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빈 박씨는 조선 중종의 후궁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아 1품 빈(嬪)에 봉해졌다. 1507년 숙의에 봉해진 후 복성군, 혜순옹주, 혜정옹주를 낳았다. 중전 자리를 탐내고 복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에 연루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사후 외손자에 의해 묘가 개장되었으며, 관련 드라마와 소설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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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 (중종)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경빈 박씨
한글 표기경빈 박씨
한자 표기敬嬪 朴氏
로마자 표기Gyeongbin Bak Ssi
가문
아버지박수림
혼인과 자녀
배우자중종
자녀복성군 (1남)
혜순옹주 (1녀)
혜정옹주 (2녀)
생몰
출생일미상
사망일1533년 6월 15일 (음력 5월 23일)
사망 장소조선 경상북도 상주시
기타
묘소경빈 박씨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2. 생애

연산군 재위 시절 흥청을 선발할 때, 그녀의 아름다운 자색이 알려졌다. 중종반정 이후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실록에는 採紅|채홍중국어 때문에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중종반정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1507년(중종 2년)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으며, 1509년(중종 4년) 중종의 장자 복성군을 낳았고, 이후 혜순옹주혜정옹주를 출산하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경빈 박씨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대단하여, 혜정옹주를 임신 중이던 경빈 박씨의 위세에 의원과 내관이 경빈에게 아부하였고, 이로 인해 중종의 또 다른 후궁인 숙의 나씨가 해산이 임박해 위급한 상태였으나 제대로 구호받지 못해 사망하는 일도 발생하였다.[2]

1517년(중종 12년), 장경왕후의 상을 마치고 새로운 왕비를 책봉하는 일과 관련하여, 경빈은 당시 중종의 맏아들을 낳은 생모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며 스스로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하였다.[3] 하지만 정광필은 경빈의 집안이 미천하고 장차 원자(인종)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하며 반대하였다. 결국 경빈의 뜻은 저지되고 중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기로 결정하였다. 대신 박씨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켜 '''경빈'''(敬嬪)에 봉했다.[3]

1522년(중종 17년), 사간원 대사간 서지 등이 상소를 올려 왕실의 법도를 비판하고,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저택에 대해 정도에 지나치다며 비판하였는데, 이때 경빈 또한 "박빈(朴嬪)이 국가에 공덕이 있지도 않으면서 지위가 1품에 오르고 총애가 후궁들 중에 제일이라 하니, 신 등은 전하께서 사정에 치우쳐서 집안을 다스려가는 정사에 누덕(累德)이 될까 싶습니다." 하며 비판을 받았다.[4]

1527년(중종 22년), 작서의 변이 일어나 경빈 박씨와 복성군 모자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

1532년(중종 27년), 유생 이종익이 작서의 변김안로가 꾸민 일이며 경빈과 복성군은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33년(중종 28년), 가작인두의 변이 발생하여 경빈 박씨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8] 복성군은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혜순옹주, 혜정옹주)는 옹주의 작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되었다. 혜순옹주의 남편은 유배되었고, 혜정옹주의 남편은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9]

1571년(선조 4년) 경빈 박씨의 외손자 김호수가 상소하여 왕명으로 묘를 개장하였다.[10]

2. 1. 입궁과 총애

연산군 재위 시절 흥청을 선발할 때, 그녀의 아름다운 자색이 알려지게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중종실록에는 採紅|채홍중국어의 일 때문에 비로소 그 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중종반정 처음에 추천되어 궁중에 들어왔는데 이 여인이 바로 경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1507년(중종 2년)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으며, 1509년(중종 4년) 중종의 장자 복성군을 낳았고, 이후 혜순옹주혜정옹주를 출산하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경빈 박씨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대단하였으며, 혜정옹주를 임신 중이던 경빈 박씨의 위세에 의원과 내관이 경빈에게 아부하여, 중종의 또 다른 후궁인 숙의 나씨가 해산이 임박해 위급한 상태였으나 제대로 구호받지 못해 사망하는 일도 발생하였다.[2]

1517년(중종 12년), 장경왕후의 상을 마치고 새로운 왕비를 책봉하는 일과 관련하여, 경빈은 당시 중종의 맏아들을 낳은 생모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며 스스로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하였다.[3] 하지만 정광필만은 경빈의 집안이 미천하고 장차 원자(인종)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하며 반대하였다. 마침내 경빈의 뜻은 저지되고 중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기로 결정하였다. 대신 박씨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켜 '''경빈'''(敬嬪)에 봉했다.[3]

이보다 앞서 왕비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 박씨('''경빈 박씨''')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왕후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전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였다. 중종도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대신의 뜻이 어떠한지를 모르겠으므로, 정광필, 김응기, 신용개 등에게 간곡한 말로 물어서 그 뜻을 시험하였다. 그랬더니 김응기는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신용개는 약간 허락하였으나,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중종 또한 새 왕비(문정왕후)를 맞기로 결심하였다.[3]

1522년(중종 17년), 사간원 대사간 서지 등이 상소를 올려 왕실의 법도를 비판하고,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저택에 대해 정도에 지나치다며 비판하였는데, 이때 경빈 또한 거론되며 "박빈(朴嬪)이 국가에 공덕이 있지도 않으면서 지위가 1품에 오르고 총애가 후궁들 중에 제일이라 하니, 신 등은 전하께서 사정에 치우쳐서 집안을 다스려가는 정사에 누덕(累德)이 될까 싶습니다." 하며 비판하였다.[4]

2. 2. 작서의 변 (1527년)

1527년(중종 22년), 중종의 장녀이자 인종의 동복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아버지 김안로(金安老)의 사주를 받아 동궁전 후원에 쥐를 불에 태워 돼지와 같은 형상으로 매달아놓고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의 변'을 일으켰는데, 경빈 박씨와 복성군 모자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빈의 시녀와 계집종들이 붙잡혀 국문을 받았으며, 대간과 삼사가 수십차례에 걸쳐 경빈 박씨와 복성군에게 죄를 주고 내쫓을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계속되는 처벌 요구에 중종은 결국 경빈과 복성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여 고향인 상주로 추방하였으며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 및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또한 파직되었다.[6]

1532년(중종 27년), 유생 이종익(李宗翼)이 옥중에서 쓴 상소에서 작서의 변은 연성위 김희가 아버지 김안로에게 사주를 받아 벌인 짓으로 경빈과 복성군은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안로는 당시 조정을 장악한 대신이었으므로 이종익의 상소에 대한 진위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이종익은 이 상소로 인해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2. 3. 가작인두의 변 (1533년)과 최후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 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다.[7]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 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가 연루되었다.

5월 23일, 경빈 박씨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아 마침내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8]

이후 홍문관과 시강원, 대간의 대신들이 복성군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 홍려의 사사를 요구하였으나, 중종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반복된 주청 끝에 복성군은 결국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혜순옹주, 혜정옹주)는 옹주의 작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되었다. 혜순옹주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고, 혜정옹주의 남편 당성위 홍려는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9]

2. 4. 사후 복권

1571년(선조 4년) 경빈 박씨의 외손자 김호수가 상소하여 왕명으로 묘를 개장하였다.[10]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경빈 박씨는 상주에 가매장되었다가 선조의 명으로 개장되었는데, 이는 외손자 김호수의 상소 때문이었다. 경빈 박씨는 복성군 이미의 어머니로, 상주 민가의 딸로 궁에 들어와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김안로는 인종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잡고 반대파를 숙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빈 박씨는 동궁을 저주했다는 무고를 당해 사사되었다. 명종선조에게 복성군의 후사를 잇게 했고, 선조는 이에 특별히 휼전을 베풀었다.[10]

3.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박수림
어머니미상
남편중종
자녀내용
장남복성군 미(嵋, 1509~1533)
장남 며느리파평 윤씨 (윤인범의 딸)
장녀혜순옹주 철환(鐵環, 1512~1583)
장녀 사위광천위(光川尉) 김인경(1515~1583)
차녀혜정옹주 석환(石環, 1514~1580)
차녀 사위당성위(唐城尉) 홍려(?~1533)


4. 평가

중종실록에 기록된 경빈 박씨에 관한 기록은 매우 부정적이다.

실록에 기록된 경빈은 미천하고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교만하여 스스로 왕비가 되길 바랐던 점은 사관들에게 부도덕하고 불순한 인물로 여겨져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복성군의 존재는 세자(인종)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1]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 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1]


5. 경빈 박씨가 등장하는 작품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 김성령이, 2001년~2002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도지원이 경빈 박씨 역을 연기했다.

5. 1. 드라마

敬嬪 朴氏|경빈 박씨중국어를 연기한 배우


5. 2. 소설

박종화의 소설 《여인천하》(1965)에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경빈박씨(敬嬪朴氏) http://encykorea.aks[...] 2022-08-22
[2] 서적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1514년 명 정덕(正德) 9년) 10월 5일 (갑오)
[3] 서적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7월 22일 (병신)
[4] 서적 중종실록 45권, 중종 17년(1522년 명 가정(嘉靖) 1년) 6월 8일 (계미)
[5] 서적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14일 (경신)
[6] 서적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21일 (정묘)
[7] 서적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17일 (기미)
[8] 서적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3일 (을축)
[9] 서적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6일 (무진)
[10] 서적 선조실록 5권, 선조 4년(1571년 명 융경(隆慶) 5년) 8월 1일 (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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